[BOOK世通, 제주 읽기] (297) 박태후, 죽설헌 원림, 열화당, 2014

/ 사진=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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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일하고 있는 미술관은 특이하게도 거대한 공원을 관리하고 있다. 행정적으로는 미술관이 공원을 관리하는 걸로 돼 있지만, 실은 미술관이 공원 안에 안겨있는 셈이다. 미술관의 예산과 인력 상당 부분이 공원을 관리하는 데 들어간다.

지난 한 해 동안, 공원에 관한 여러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애써 나무를 동글동글하게 자르는 것일까? 모든 풀나무는 그 나름대로 자연미를 가지고 있는데, 왜 궂이 천편일율적으로 동글동글하게 이발을 할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이모저모를 알아본 결과, 이것이 정원 관리에 쌓여온 오랜 관행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특히 관공서에서 향나무와 같은 수목들을 얼마나 단정하게 깎아주느냐 하는 것이 그 기관의 기강 상태를 파악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 운영의 정책 방향들 가운데 가장 굵은 줄기로 생태미술관을 표방해온 필자로서는 이점이 크게 마음에 걸렸다. 인공적인 정원 가꾸기가 아닌 생태적 가치를 고스란히 담은 자연숲 정원은 불가능한 것인지 고민하던 중에 죽설헌을 떠올렸다. 

고민을 안고 찾아간 죽설헌은 예상보다 훨씬 더 훌륭한 숲이었다. 수백종의 풀나무들이 살고 있는 이 숲에는 등나무 덩쿨로 이뤄진 주차장이 있고, 왕버들과 노랑 창포꽃이 피어나는 습지와 거대한 파초의 숲도 만났다. 정원을 상상하고 찾아간 나는 숲과 못을 만나면서 경탄을 연발했다. 생태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고민하고 있던 터에 큰 스승을 만난 것이다.

내친 김에 저자를 미술관 강사로 초대해서 강의를 들었다. 죽설헌에 관한 사진 기록을 중심으로 40여년 간에 걸친 자연숲 가꾸기 이야기를 들으니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은 물론이고, 우리가 알고 있던 정원에 관한 오해와 편견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화가 박태후의 정원 일기’라는 부제를 단 이 책 ‘죽설헌 원림’은 40여년동안 자연숲 정원을 가꾼 예술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에서 1만3000평에 이르는 거대한 정원을 가꿔온 예술가 박태후의 사진과 글 기록이다. 위대한 자연의 힘에 깃들어 사는 삶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저자의 지론은 풀과 나무로 이뤄지는 정원이야말로 최고의 설치미술이라는 것. 생명의 이치를 따라 변화무쌍하게 이뤄지는 봄과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의 계절 변화에 따라 각각의 색다른 정동을 이끌어내는 위대한 자연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원을 가꾸며 체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지식전달 이상의 효능감을 발휘한다. 자연숲의 경이로운 장면들을 담은 사진과 더불어 차분하면서도 감동적인 글을 실었다. 꽃의 노래를 듣는 봄, 초록의 향연이 벌어지는 여름, 풍요로운 가을과 깊은 정취의 겨울에 이르기까지 죽설헌에서 맞이하는 자연숲 이야기는 전원생활의 깊은 운치를 담고 있다. 붉은 매와와 노랑꽃창포에서 봄을 느끼고, 맥문동이 보라꽃을 피우면 여름이다. 꽃무릇의 주황색은 가을을 알리고, 눈 덮인 숲에서 겨울의 멋과 생멸을 거듭하는 생명순환의 뜻을 배운다. 

20세기 이후 한국 정원은 유럽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줄 맞추고 깎고 다듬는 인공적인 가드닝이 대세를 이뤘다. 자연미의 가치를 찾아보기 어려운 공간으로 변모한 것이다. 근대 도시에서 나타나는 조경과 정원의 근본 틀이 유럽-일본식으로 굳어진 것이다. 정원에 관한 책은 많아도 제대로 된 한국 정원에 관해 체계적인 이해를 구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원예를 공부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화가의 길로 접어든 박태후의 삶 전체를 오롯이 담고 있다.

그의 정원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생장과 소멸을 거듭하는 식물의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것이어서 말그대로 자연이 살아있는 공간이다. 한국 정원 가꾸기에 신념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살아온 박태후의 죽설헌에는 삶과 예술, 인간과 자연, 숲과 정원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생명의 신성이 담겨있다.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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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대학교 예술학 학사, 석사, 미술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회장, 미술평론가

현(現) 광주시립미술관장

전(前) 부산비엔날레 전시기획팀장,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제주도립미술관 관장,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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