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깬 돌을 보았지좁쌀만 한 섬 안에서 좁쌀 먹고 자란 놈이좁쌀만 한 생각으로 좁쌀 같은 생을 산다돌인들 차마 어쩌랴, 그 곁에 와 놓일 뿐장마 때 비를 맞아 그 물기를 품었다가가물면 물기 나눠 떡잎들의 목을 축이던나 그때 가문 세월에 그런 돌을 보았지한낮에 볕을 받아 그 온기를 품었다가밤이면 체온을 나눠 어린 초목을 잠재우는 나 그때 엄한 세월에 그런 돌을 보았지이리저리 구르면서 놓일 자리 찾던 그 돌기우뚱 담벼락에 꼭꼭 숨어 받쳐준 돌어쩌다 막가는 세월에, 잠깬 돌을 보았지/ 2013년 고정국 詩#시작노트기상의 합중국, 토양의 합
네 바탕에 힘을 쓰라 –관찰일기 30사루비아 긴 몸통이 지평선에 포개는 날물 먹은 토양층에 긴장이 풀리면서이제는 떠날 때라며 서로 손을 놓았네내 아파 신음하던 이월에서 오월까지 곁에 바짝 다가와서 혈육처럼 보살피던친구가 쓰러졌단다, 제 할 일을 하고서병수발 글 수발에 밤을 함께 보내주며자는 듯 눈을 감는 가난뱅이 내 글벗이여삼년을 함께 살다가 내 손목을 놓다니,꽃 탑 한 층 올리려고 후들댔던 종아리며싹과 꽃을 위해 쫄쫄 굶던 어버이 마음백일하 드러난 뿌리에 눈물겨워오누나무본務本하라 무본務本하라, 네 바탕에 힘을 쓰라어미 사루비아가
할미꽃, 올해 다시 오셔서“찌르르…”, 밀약의 전류가사방천지 가득한 봄가랑비 어젯밤에 은발銀髮 곱게 내려빗고그래도 이승이 좋다고 올해 다시 오셔서세상을 증오한 만큼 사랑할 수도 있다는벙어리 삼십 년에 혼자 늙기 서럽더라는 연상의 할미꽃 한 송이 자리 뜰 줄 모르네/ 2007년 고정국 詩#시작노트한 송이 할미꽃에서 ‘할미’라는 늙은이의 선입견보다, 아름다운 머릿결을 봅니다. 나이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거울 앞에 다가가서 자신의 얼굴이나 머릿결을 살피는 아내의 마음…, 그러던 어느 봄날 고사리꺾자면서 함께 고향 뒷산에 올라갔습니다.
난쟁이 휘파람소리 난세에 가솔 잃고 이리저리 빌어먹던남원 쪽 ‘ᄑᆞᆯ개’동산 난쟁이 홍씨 그가구좌 어느 부잣집 말테우리 됐다지구곡간장 다 녹아든 바람소리 휘파람소리다랑쉬 꼭대기에 파르르 풀잎이 떨고아득히 오름 자락엔 조랑말이 울었지휘파람 한 번 불면 테우리들 따라 불고휘파람 두 번 불면 우마들이 따라오고바람도 귀를 세우고 억새들을 깨웠지휘파람 높은 곳에 바람이 따라오듯목청 좋은 사람에겐 슬픔이 따라왔지어쩐담, 난쟁이 홍 씨…, 일이 오고 말았지소개령이 해제되고 태우리가 돌아왔지맨 먼저 난쟁이 홍씨 ‘ᄌᆞᆫ못’가에 도착했지그곳에 우마
우리는 그곳을 수평선이라 한다 -1소주잔 눈금의 높이로 밤새는 줄 모르던 그때어둠의 허용치 밖에 섬 하나가 자리해 있다까맣게 잊고 살아온 나의 반쪽 그 까만 섬에아리아리 글썽여오는 금단의 불빛들누군가에 갇혀보고 싶어서누군가를 가둬두고 싶어서끝끝내 선을 섬기다 선 밖으로 버려진 것들세상천지에 무슨 놈의 견우와 직녀가 저리도 많담!무엇이나 쏟아낼 수 있고, 무엇이나 참아낼 수 있는 곳난파된 꿈의 조각들이 바닷새 형상으로 날아오르다 멈칫, 내가 어느새한 점 불빛으로 글썽이는 곳우리는 그곳을 수평선이라 한다/ 2018년 고정국 詩#시작노트
밤이면 작은 불 켜고바다를 향해 앉으면이름 없는섬있었네수평선 가물가물물새 한 마리 날려 보내고밤이면 작은 불 켜고홀로 참는섬있었네/ 고정국 詩#시작노트봄눈 오는 날, 방파제 등대 꼭대기에 빨간 눈 ‘조나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년 전 밤, 항구야경을 찍기 위해 방파제공사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발밑에서 파닥거리던 괭이갈매기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낚시꾼이 버리고 간 낚싯바늘이 부리 안에 박혔던 것이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심조심 그 갈매기를 붙잡고 낚싯바늘을 빼려는 순간, 녀석은 목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베란다 3월 풍경투명한 잔등으로 불빛 튕겨 내는 일맨발 잔뿌리로 지하계단을 더듬는 일초록색 양손바닥에 하늘 영접하는 일종일토록 전화 한 통 초인종도 울리지 않아저들은 나를 보고 참 쓸쓸한 사내라 하네세상이 너무 춥다고, 보일러를 켜라네여름에도 제주가 춥다는 다문화 신부처럼저을 위해 한 시간씩 보일러를 때라는 구나,여름 꽃 사루비아가 한 겨울에 피어서엊그제 돋보기 들고 우리 창에 찾아와서‘오순이’ ‘도순이’의 머리 쓰다듬고 가신 해님이 그리운가봐, 자꾸 창을 엿본다/ 2013년 관찰일기 고정국 詩#시작노트노형동 우리 집 3층 베란다에
봄눈 – 일회용 날개를 달고길 위에 눈이 와도 소실점은 따뜻했다아득히 점선을 따라온 기러기의 행렬처럼양순한 눈송이들이 줄을 지어 내리고일회용 날개를 달고 참 멀리도 날아온 저들저들은 저들대로 오르내리는 길 있었네하반신 천상에 두고그리움만 품고서착지점 서성이던 한 점 눈송이가 해안도로 차창 틈을 조심조심 비집고 와서따뜻한 종이컵 속에 가만 눈을 감던 날/ 2010년 고정국 詩#시작노트시 쓰는 것 말고 또 하나, 필자의 취미생활이 겨울철새를 카메라에 담아두는 데 있습니다. 도요새를 비롯, 겨울철새들은 주로 제주 해안가나 물 웅덩이가 있
마라도까맣게 한 세월을 수평 끝만 적시면서사무친 회귀의 꿈에 저 홀로 야위는 섬하늘도 이곳에 와선 뭍으로만 기우네뭍 소식 섭섭한 날은 바다마저 돌아눕고파랑도 가는 뱃길에 잠겨버린 무적소리마파람 보채는 이 밤도 불을 끄지 못하는가차라리 외로운 날은 마라도에 가 앉으리한 점 피붙이로 빈 해역만 떠돌다가남단 끝 선명히 찍히는 낙관落款으로 앉으리/ 1978년 고정국 詩#시작노트신이 수평선을 그을 때 그 끝부분에 붓놀림이 멈칫하여, 한 점 섬으로 생겨난 것 같은, 지귀섬, 섭섬, 문섬, 범섬, 새섬, 형제섬 그리고 가파도와 마라도! 1100
겨울반딧불몸뚱이 절반도 못 가눌 빛을 위하여하늘만한 누명을 쓰고 산다어디론가 불려가고 있다, 미행도 호출부호도 없는 한라산 5·16도로핏기 없는 불씨 하나가 몽유병자처럼 가고 있다결빙이 눈높이로 번득일 시각이면 견고한 등화관제 속으로 묻히는 검정색 액셀 G S D…, 이윽고 빙판길은 무태장어 유영遊泳을 시작한다시가 죽어서 가벼운 눈발로 흩어지는 아스팔트에미안하다 슬픈 반려자여, 어둠의 새끼들이여오늘밤은 암만해도 누추한 불빛들끼리 만나지상과 천상의 안부라도 나눠야겠다젖어 있는 것들은 저마다 빛을 품는다 그리고 나는 고백해야겠다,가늠
굴뚝새당초 너의 길은 낮은 데로 뚫렸어라흉흉한 돌담뿌리 해거름이 서러운 날채석장 아득히 오는 정釘 소리로 우는 새야살아도 막장 같은 굴뚝이나 후비는 짓대쪽 같은 목소리 담벼락에 찢겨나고피 묻은 시어詩語만 흘리는 날갯짓 그 행적이여한 생애 절반쯤은 누명 쓰고 사는 세상시인은 언제부터 굴뚝새를 닮았던가추녀 밑 배고픈 일월에 돌이끼만 쪼아라/ 1988년 고정국 詩#시작노트삼십 년 전에 강원도 어느 독자로부터, 인상적인 엽서 한 장을 받았습니다. 나의 첫 시집 『진눈깨비』에 게재된 시조 「굴뚝새」에 공감했는지, 엽서 가득 그 독자가 겪었을
일출봉 해돋이몇 밤을 뒤척이다 섬을 베고 누운 바다홀연 내 역마살이 바닷새로 깃을 펴면치자 빛 빈 수반 위로 떠오르던 남녘 아침동편 수평 가득 돛폭을 거느리고팔방으로 눈을 뜨는 저 당찬 처녀 햇살잘 빚은 와인 한 잔이 아침 창에 놓인다/ 1985년 고정국 詩#시작노트초등학교 6학년 때, 중학생인 형의 국어교과서를 훔쳐봤습니다. 그런데 거기, 이호우의 시조 「달밤」이 게재돼 있었습니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로 시작해서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로 끝나는 네 수짜리 연시조를 서너 번 읽고는, 토시 하나
삽을 씻으며나보다 삽을 먼저 씻는다시린 물속에 삽날과 손을 담그고한해 저물도록 피와 땀을 쏟았던흙 묻은 살갗들을 어루만진다삽질한 만큼 거둔다는 약속이야 그렇지만,저기압의 일기예보 때마다뼈와 근육이 따로 뒤척이는 이부자리에밤새도록 파고드는, 물파스냄새를 너는 안다, 너는 안다무 농사 배추농사 때로는 자식농사의 밭떼기거래가 끝나고진눈깨비 농로길로 돌아온 밥상머리에,아들이 흘린 밥알을 주어먹는 아홉 개 반, 지문 없는 내 손가락의 내력을 너는 안다, 너는 안다세모 때면 들판으로 눈이 내리고추곡수매를 거절당한 노적가리마다 시름이 쌓이면협동
납작한 것들에 대하여 속을 다 비우고서야, 밟히는 게 아프지 않아속을 다 비우고서야 납작해질 수 있다는 밟혀서 온전한 것들이 보란 듯이 밟힌다유리가 제 몸을 던져, 유리조각이 탄생하듯더 낮게 더 작게, 부서지기를 갈구하던욕망의 사금파리가 여기저기 빛날 때한순간 한 토막이, 징검돌로 놓인 이 밤죽어서 빛으로 화한 재활용의 조각들이 은하수 다리를 건너와 눈송이로, 내리고,누가 이 길바닥에, 온전하기를 바라겠느냐늦은 밤 딸랑딸랑, 길 구르던 맥주깡통을 건장한 운동화들이 강 슈팅을 날린다길들여진 세상에서, 다시 길들여지기 위해길 위에 납작
오석烏石 한 점언제나 돌과 진리는 낮은 곳에 자리했다맞닿은 인연 앞에 몸과 마음을 고쳐 잡으며한 덩이 오석烏石을 껴안고 밤새 볼을 비비던 사람탐석의 먼 길에서 꽃이 되고 별이 되고발 딛는 곳곳마다 시와 사랑을 싹틔우던묵묵히 바위 하나가 지고만방의 길 밝히네어둠을 겹겹이 모아 한 올 빛을 저장하듯마모된 조약돌에도 심장 하나씩 감춰놓고사람을 기다린 것이 하늘이고 땅이란다사랑도 미움도 한恨도 다 삭힌 형상석 하나가바람서리 불변함으로 정온히 몸을 뉘일 때창변의 아침 수반에 금발 머리 태양이 뜬다/ 2013년 고정국 詩#시작노트1988년 신
담쟁이 바람벽에애써 벽을 넘고 다시 벽에 갇히리라하루 한 번 갇히고 하루 한 번 탈옥하는…저들은 절망 앞에서 사다리를 버린다한 뼘 오르기 위해 두 뼘씩 낮추는 비법담쟁이 초록연대가 머물다 간 바람벽엔선천성 외유내강의 육필 획이 넘치고앞에서 뼈를 버리고 뒤에서 어둠을 쓸며낙지보법 하나만으로 산전수전 건너온 그대외고집 갑골문자엔마침표가 없었네/2011년 고정국 詩#시작노트십이월이 되고 진눈깨비 내리면, 담쟁이들도 빨갛게 단풍 든 제 이파리를 내립니다. 이파리 없는 담쟁이 줄기에서 하루 한 번 갇히고 하루 한 번 탈옥하며, 그 절망을 극
감나무단풍 한 잎에도 곱게 늙는 법이 있다지박토 위 한 생애를 순한 빛만 추스르며가난도 정으로 달래던 내 유년의 감나무야때로는 그 고집이 감잎 따라 물이 들고토종감 정수리에 검버섯도 필 쯤 해서촌로는 노을을 향해 빈 지게를 내리는가천년을 느껴 흐르던 한반도 저 강 빛 만치어버이 먼 심려에 떫은맛도 삭혔을 오늘이승의 종언終焉만 같은 한 톨 감이 붉게 탄다/1988년 고정국 詩#시작노트남제주군 남원면 위미리 1912번지, 올레가 길었던 그곳에는 안거리 밖거리 그리고 외양간 등 초가지붕이 셋이었습니다. 남향인 안거리 동쪽에 부엌이 있었고
길 뜨던 낙엽 한 장이초겨울 보도블록에 반나체로 밟히는 소녀바람이 흘리고 간 원조교제 광고전단을 길 뜨던 낙엽 한 장이 덮어주고 있었다/2004년 고정국 詩#시작노트필자가 농업잡지 월간《농업정보》지를 발간하던 당시, 전국 주요 농산물 시장을 취재하던 길이었습니다. 국내 한 사과 농가를 취재하고 근처 모텔에 숙소를 정하였습니다. 모텔 가까운 쪽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그 골목 과일가게에 진열된 과일들을 구경하면서 간식용 빵과 과일을 샀습니다. 그리고 모텔 입구를 막 들어서려는데 명함 크기의 광고전단 여러 장이 길바닥에 붙여져 있었습니
단풍 한 잎 가볍게 놓여누구에게 내려 보낸 속달우편물일까잠 설친 아침계단에 하늘나라 소인이 찍힌황금색 상형문자의 단풍 한 잎 가볍게 놓여오소소… 건강치 못한 그믐달이 이우는 창에날 새면 하나 둘씩 불려가는 순종의 목숨천상의 부적을 뗀다, 은행잎이 또 진다가지 끝 바람이 와 내 여죄를 다그치고반타작 삽날 위에 명줄처럼 금이 간 햇살체부遞夫가 한천에서 내린 등기 한 통을 건네고 간다/1998년 고정국 詩#시작노트1998년 겨울초엽, 작품 한 편 쓰려고, 하얗게 밤을 새고 아침계단을 내려오는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단풍 한 잎이 시멘트
길 한 세상 사는 것이 다 길이라 하는 것을물빛 글썽이는 산만 보고 가노라면세월은 소롯길로 와서억새꽃을 피웠네노을 녘 산마루엔 하늘만한 뉘우침이웃자란 억새밭에 하얗게 눕던 날은길 잃은 조랑말 한 마리 산을 향해 울었다반평생 굽잇길을 먼발치로 따라와서때로는 이마 섶에 주린 듯 돋는 별빛 그 순명 비포장길에서 삐걱이는 내 수레여/1987년 고정국 詩#시작노트맨 처음 땅 위에 길을 낸 것은, 하늘의 심부름꾼 바람이었을 겁니다. 바람이 뚫어놓은 길로 물이 흘렀고, 그 물가엔 파릇파릇 초목이 자랐을 겁니다. 여기저기 초식동물이 모여들었고,